티스토리 뷰

목차



    반응형

    달빛 아래 피리 부는 도깨비

    태그

    #조선시대, #전주한옥마을, #도깨비, #피리, #저주, #로맨스, #구원, #민속신앙, #보름달, #전설, #미스터리, #금기

     

    디스크립션

    전주 한옥마을, 매월 보름날 밤이면 신비로운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다. 300년 전 인간을 사랑한 도깨비의 저주받은 사랑이 시작된 곳이다. 피리 소리를 따라가면 달빛 아래에서 피리를 부는 도깨비를 만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를 만난 자는 모두 사라졌다. 과연 도깨비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1 도깨비의 첫 만남

    음침한 밤, 전주 한옥마을의 좁은 골목길입니다. 보름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자, 처마 끝에 달빛이 은은하게 맺힙니다. 멀리서 애절한 피리 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를 타고 한밤의 바람이 스쳐갑니다.

    기생 월향은 피곤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느 날과 같이 술자리에서 손님들을 모시고 온 참이었죠. 그때였습니다. 귓가를 스치는 피리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가슴 한켠이 울리는 듯했습니다.

    "이 늦은 밤에 누가..." 월향은 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좁은 골목을 돌자 달빛이 쏟아지는 작은 마당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붉은 도포를 입은 남자는 달빛 아래에서 피리를 불고 있었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밤이었지만, 그의 도포 자락과 긴 머리카락은 어딘가 모르게 흩날리고 있었죠. 피리 소리는 애절하면서도 달콤했고, 슬프면서도 그리운 것 같았습니다.

    월향이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 때, 남자가 피리를 내렸습니다.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이리 와보시오, 월향 아가씨."

    달빛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였습니다. 월향은 놀라 뒤로 물러섰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누... 누구십니까?"

    남자는 대답 대신 다시 피리를 들어올렸습니다. 이번에는 더욱 애절한 곡조가 흘러나왔고, 월향은 마치 홀린 듯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달빛이 남자의 얼굴을 비추었을 때, 월향은 숨을 들이켰습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감도는 신비로운 용모였습니다.

    그렇게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한밤중, 달빛 아래에서 도깨비 도령과 기생의 금지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2 비밀스러운 약속

    그날 이후, 월향의 일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낮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손님들을 모시고 가무를 선보였지만, 밤이 되면 가슴 한켠이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그 피리 소리가 들릴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죠.

    "아가씨, 요즘 안색이 좋아 보여요." 단장이 월향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혹시... 좋은 양반이라도 만났나요?" 월향은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그 신비로운 남자의 모습이 깊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보름달이 다시 떴습니다. 월향은 전날 밤과 같은 시각, 같은 골목을 찾았습니다. 달빛이 쏟아지는 마당에는 어김없이 그가 서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검은 도포를 입고 있었지만, 그 신비로운 기운만큼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소, 월향 아가씨."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습니다. 그의 눈빛에는 달빛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매일 밤 이렇게 피리를 부시는 건가요?" 월향이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아니오. 보름달이 뜰 때만..." 그가 천천히 걸어와 월향의 앞에 섰습니다. "그대를 기다리며 부는 것이오."

    남자의 말에 월향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습니다. 수많은 손님들을 상대하며 느낀 적 없는, 순수하고도 강렬한 감정이었죠.

    "다음 보름달이 뜨는 밤에도... 올 수 있을까요?" 월향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습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습니다. "올 수는 있소만..."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습니다. "약속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소. 나는... 인간이 아니오."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며 주위가 어두워졌습니다. 남자의 발끝이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을 월향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그가 도깨비임을 깨달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다음 보름달에... 꼭 오겠습니다." 월향의 대답에 도깨비의 눈빛이 깊어졌습니다. 그들의 금지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3 사랑의 깊어짐

    보름달이 뜰 때마다 월향과 도깨비의 만남은 계속되었습니다. 달이 차오를 때면 월향의 가슴도 함께 부풀어 올랐습니다. 도깨비는 그녀를 위해 매번 다른 곡조의 피리를 불어주었고, 때로는 먼 나라의 이야기를, 때로는 하늘에서 본 구름 위 세상을 들려주었습니다.

    "도령님은 제가 부르는 노래를 들려드릴 수 없어 아쉽습니다." 어느 보름날 밤, 월향이 말했습니다. 기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남들 앞에서는 노래하고 춤추어도, 정작 마음을 준 이에게는 자신의 예술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도깨비가 부드럽게 미소지었습니다. "나는 매일 밤 그대의 노래를 듣고 있소." 그의 말에 월향이 놀라 고개를 들었습니다. "술집에서, 장터에서, 그대가 부르는 모든 노래를 멀리서 듣고 있었소. 그대의 슬픈 노래가 들릴 때면 내 마음도 함께 아팠소."

    "그런 곳에서도... 저를 지켜보고 계셨나요?" 월향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자신이 노래하고 춤출 때마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자신의 예술을 사랑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가슴 깊이 와닿았습니다.

    도깨비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월향의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월향의 마음은 따뜻해졌습니다. "울지 마오. 이제 나는 그대의 노래를, 그대는 내 피리를... 서로에게만 들려주면 되지 않겠소?"

    달빛 아래, 월향이 조심스레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점점 커져갔습니다. 도깨비의 피리 소리가 그녀의 노래에 맞춰 울려 퍼졌습니다. 피리와 노래가 어우러진 그들만의 이중주는 달빛보다 더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도 잠시, 멀리서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도깨비의 모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월향은 그의 손을 더욱 굳게 잡았습니다. 둘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달빛 아래의 만남이 언제까지 허락될지 모른다는 것을...

    4 마을의 소문

    전주 한옥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죠. 처음에는 그저 떠도는 이야기였지만, 점점 더 구체적인 목격담이 더해졌습니다.

    "분명히 보았다니까요. 달빛 아래 피리 부는 도깨비 도령을..." 장터의 한 노파가 말했습니다. "키가 훤칠하고 붉은 도포를 입었는데, 발이 땅에 닿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더 충격적인 소문이 퍼졌습니다. 피리 부는 도깨비와 밤마다 만나는 기생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문은 마침내 월향이 몸담고 있는 기생청에까지 들려왔습니다.

    "월향아." 단장이 그녀를 불렀습니다. 평소의 부드러운 어조가 아닌, 차가운 목소리였습니다. "요즘 보름달 밤마다 어디를 다니는 게냐?"

    월향의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하지만 이내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산책을 나갔었을 뿐입니다."

    "도깨비를 만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단장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그게 사실이란 말이냐?"

    월향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네가 아끼는 제자라 그동안 눈감아 주었다만..." 단장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모른 체할 수 없구나. 도깨비와 인간의 사랑은 금기야. 그 끝은 언제나 비극이었어."

    창 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달이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월향의 가슴속에서 피리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더 이상 보름달이 뜨는 밤에 나가서는 안 된다." 단장의 목소리가 단호했습니다. "오늘부터 네 방 문은 밤마다 잠글 것이다."

    월향은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달빛이 그녀의 눈물을 비추었습니다.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이제 그에게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5 금기의 대가

    달이 차오르는 밤이면 월향의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젊은 기생의 투정으로만 여겼지만,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 앉은 월향의 모습은 점점 수척해져 갔습니다.

    "이상하구나..." 어느 날 단장이 중얼거렸습니다. 거울을 보고 있던 월향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리창에 비친 그림자처럼 몽롱한 모습이었습니다.

    "도깨비의 기운이 묻었나 봅니다." 찾아온 무당이 말했습니다. "인간이 도깨비와 사랑에 빠지면, 점점 이승의 기운을 잃게 됩니다. 달빛처럼 흐려지다가... 마침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지요."

    그날 밤, 월향은 자신의 손을 들어올려 보았습니다. 달빛에 비친 손이 반투명하게 보였습니다.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한 희망이 피어났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사라진다면, 도깨비의 세계로 가서 그와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안 됩니다, 아가씨." 방문 밖에서 들리는 몸종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오늘은 보름달입니다. 제발 창문은 열지 마세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월향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평소보다 더욱 애절했고, 마치 울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도령님..." 월향이 창가로 다가갔습니다. 그녀의 모습이 달빛에 더욱 희미해졌습니다. 방 안의 초가 바람에 흔들렸고, 문 밖에서는 몸종들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달빛이 가장 밝아지는 순간, 월향의 몸이 완전히 투명해졌다가 다시 진해졌습니다. 그제야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도깨비의 사랑을 받아들인 대가로, 자신도 이제 인간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슴 한켠이 설렜습니다.

    6 이별의 순간

    달빛이 가득한 마당에 도깨비가 서 있었습니다. 평소와 달리 피리를 불지 않고 있었죠. 그의 붉은 도포 자락이 바람 없는 밤에도 흩날렸습니다.

    "그대를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소." 도깨비의 목소리가 달빛처럼 차갑게 울렸습니다. "나의 욕심이 그대를 이렇게 만들었소."

    월향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달빛 아래서 그녀의 몸은 이제 거의 투명하게 보였습니다. 마치 유리로 만든 인형처럼 달빛이 그대로 통과해 보였죠.

    "도령님 때문이 아닙니다." 월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제가 선택한 사랑입니다. 후회하지 않아요."

    도깨비가 한 걸음 다가왔습니다. 그의 눈에서 푸른빛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인간과 도깨비의 사랑은 금기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정해진 운명이었소. 내가 그대를 만난 것도, 사랑한 것도, 모두 잘못된 것이었소."

    "도령님..." 월향이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이 도깨비의 몸을 통과해 버렸습니다. 이제는 서로를 만질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곡 불어주고 싶소." 도깨비가 피리를 들어올렸습니다. "그대가 처음 들었던 그 곡이오."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처음 들었던 그날처럼 애절하면서도 달콤한 선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깊은 이별의 슬픔이 더해져 있었죠.

    "이제 그대를 보내주어야 할 때요." 도깨비의 목소리가 피리 소리처럼 흩어졌습니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간 그대의 혼마저 사라질 것이오."

    월향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하지만 그 눈물방울은 땅에 닿기도 전에 달빛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녀의 모습도 점점 더 희미해져 갔습니다.

    "다음 생에는... 꼭 인간으로 태어나 그대를 만나고 싶소." 도깨비의 마지막 말이 달빛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7 저주의 시작

    달이 저물고 해가 떴지만, 도깨비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월향이 사라진 마당에 홀로 서서, 그날 밤의 기억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 달빛 속으로 스러지던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도깨비 도령이 인간을 사랑했다지?" 갑자기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도깨비 왕이 나타났습니다. "너는 금기를 어겼다."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도깨비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의 붉은 도포가 잿빛으로 변해갔습니다.

    "벌?" 도깨비 왕이 차갑게 웃었습니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벌을 내리겠다. 너는 영원히 이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매달 보름날 밤, 그녀를 잃은 이 자리에서 피리를 불어야 한다."

    도깨비의 눈에 절망이 깃들었습니다. "그저 그뿐입니까?"

    "피리 소리를 들은 인간들은 너의 슬픔에 이끌려 이곳을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도깨비 왕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달빛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마치 네가 사랑한 그 기생처럼."

    "안 됩니다!" 도깨비가 절규했습니다. "무고한 이들까지..."

    "이미 늦었다." 도깨비 왕이 손을 휘둘렀습니다. 순간 도깨비의 피리가 새카맣게 변했고, 그의 몸은 땅에 사슬로 묶이는 듯했습니다. "이제 너는 영원히 이 저주에 갇혀, 사랑하는 이를 잃는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이다."

    도깨비 왕이 사라진 후, 도깨비는 피리를 들어올렸습니다. 이제 그의 피리 소리에는 슬픔뿐만 아니라,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습니다. 달빛이 그의 눈물을 비추었고, 그 눈물방울은 땅에 떨어져 시커먼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8 300년의 기다림

    세월이 흘러 조선의 한옥마을은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해갔지만, 보름달이 뜨는 밤의 피리 소리만은 변함없이 이어졌습니다. 300년의 시간 동안, 달빛 아래에서 수많은 사연들이 피어났다 지워졌습니다.

    "또 한 명이 사라졌다는구나." 마을 노인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번에는 스물셋의 처녀라지? 보름달 밤에 피리 소리를 따라갔다가..."

    오래된 기록들을 보면 매년 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보름달이 뜨는 밤, 애절한 피리 소리가 들리면 누군가는 그 소리를 따라 걸어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달빛 저주'라 불렀습니다.

    도깨비는 매번 피리를 불기 전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자신의 피리 소리가 또 다른 희생자를 부를 것을 알면서도, 저주에 묶여 멈출 수 없었습니다. 달빛 아래 검은 도포 자락이 흩날렸고, 그의 발치에는 300년 동안 쌓인 시커먼 꽃들이 가득했습니다.

    "월향아..." 도깨비가 피리를 들어올리며 속삭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그대처럼 저주가 되었구려. 보름달이 뜰 때마다 그대를 잃는 고통을 겪어야 하니..."

    멀리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도깨비의 눈에서 푸른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또 다시 누군가가 자신의 피리 소리에 이끌려 오고 있었습니다.

    "제발... 오지 마시오." 도깨비가 중얼거렸지만, 그의 피리는 더욱 애절한 소리를 내뱉었습니다. 달빛이 점점 밝아졌고, 골목 저편에서 한 여인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달빛은 찬란했고, 피리 소리는 애절했으며, 또 한 명의 영혼이 달빛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300년의 시간 동안 이어진 저주는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9 환생한 월향

    그날도 평범한 보름날이었습니다. 도깨비는 늘 그래왔듯이 달빛 아래 서서 피리를 불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가 달랐습니다. 피리의 음색이 평소와 다르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군..." 도깨비가 피리를 내려다보았습니다. 300년 동안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습니다. 마치 피리가 스스로 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골목 저편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도깨비는 순간 숨을 멈췄습니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마치 300년 전 월향과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일이에요." 여인이 말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부터 자주 꾸던 꿈이 있었어요. 달빛 아래서 누군가가 피리를 불고, 제가 그 소리를 따라가는 꿈이었죠."

    도깨비의 손에서 피리가 떨어졌습니다. 그 소리에 여인이 놀라 고개를 들었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도련님..." 여인의 입에서 나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녀도 놀란 듯 자신의 입을 가렸습니다. "제가 지금 뭐라고 한 거죠? 이상해요.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도련님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도깨비가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달빛이 그의 잿빛 도포를 비추었고, 발치의 시커먼 꽃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월향아..." 도깨비의 떨리는 목소리가 달빛 속에 흩어졌습니다.

    "그래요... 월향..." 여인이 중얼거렸습니다. "제 전생의 이름이었나 봐요. 이상하게도 그 이름이 너무나 친숙하게 느껴져요."

    도깨비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이번에는 푸른빛이 아닌, 맑은 빛을 띄었습니다. 300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도포가 다시 붉은 빛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10 피리 소리의 진실

    "이 피리 소리..." 환생한 월향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전 이 곡을 알아요. 제가 부르던 노래였어요."

    도깨비가 놀라 피리를 바라보았습니다. 300년 동안 그가 불어온 이 곡이, 사실 월향이 그에게 들려주었던 노래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도깨비 왕은 나에게 저주를 내렸지만..." 도깨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내 마음은 그대를 잊지 못했소. 의식하지 못한 채, 나는 그대의 노래를 피리로 불어왔던 것이오."

    달빛이 두 사람을 비추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월향의 모습이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깨비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져 갔습니다.

    "매번 보름달이 뜰 때마다..." 도깨비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 피리 소리를 듣고 찾아왔소.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달빛 속으로 사라져갔지요. 그들이 듣고 찾아온 것은 사실 그대의 노래였는데..."

    월향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도깨비의 뺨에 닿았습니다. 이번에는 그녀의 손이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사라진 게 아니에요." 월향이 미소지었습니다. "저처럼... 언젠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 달빛 속으로 들어간 거예요. 도련님의 피리 소리... 아니, 제 노래는 그들에게 환생의 길을 열어준 거예요."

    도깨비의 손에 들린 검은 피리가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달빛을 머금은 듯 은은한 광채를 내뿜었습니다. 주변에 피어있던 시커먼 꽃들도 하나둘 은빛으로 변해갔습니다.

    "도깨비 왕의 저주는..." 도깨비가 깨달은 듯 중얼거렸습니다. "사실 저주가 아니었던 거요. 그대를 다시 만나기 위한...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던 거요."

    11 마지막 선택

    달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습니다. 도깨비 왕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얼굴에 분노가 아닌, 깊은 통찰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300년이 지났구나." 도깨비 왕이 말했습니다. "너는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인간으로 환생하여 그녀와 함께 살 것인가, 아니면 도깨비의 힘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영원히 이 자리를 지킬 것인가."

    도깨비가 월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다만 깊은 신뢰와 사랑만이 담겨 있었죠.

    "인간으로 환생한다면..." 도깨비 왕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너희는 평범한 삶을 살다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도깨비로 남는다면, 영원히 이 자리를 지키며 사랑하는 이들을 환생의 길로 인도할 수 있지."

    월향이 도깨비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도련님... 이번에는 제가 도련님을 기다리겠습니다. 다음 생에서, 그 다음 생에서도... 도련님이 부르는 피리 소리를 따라 항상 이곳으로 돌아올게요."

    도깨비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300년의 시간 동안, 그는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도깨비가 고개를 들어 도깨비 왕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영원히 이 피리를 불겠습니다."

    도깨비 왕이 깊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의 손짓과 함께 도깨비의 도포가 달빛처럼 하얗게 변했고, 검은 피리는 순백의 빛을 내뿜었습니다.

    "이제 넌 더 이상 저주받은 도깨비가 아닌, 사랑을 이어주는 달빛 도깨비가 될 것이다." 도깨비 왕의 말과 함께, 주변의 모든 꽃들이 은빛으로 피어났습니다.

    12 영원한 사랑의 약속

    달빛이 가장 밝게 빛나는 순간, 월향의 모습이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 대신 평온한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월향이 도깨비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끝이 아니에요. 새로운 시작이죠."

    도깨비가 하얀 피리를 들어올렸습니다. 이번에는 슬픔도, 애절함도 없는 맑은 곡조가 울려 퍼졌습니다. 마치 축복을 내리는 것 같은 평화로운 선율이었습니다.

    "다음 생에는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요?" 월향이 미소 지었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이제 달빛처럼 환해졌고, 발걸음은 공중에 떠오르는 듯했습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소." 도깨비가 답했습니다. "어떤 모습이든, 어떤 시간이든, 나는 그대를 알아볼 수 있을 테니..."

    주변의 은빛 꽃들이 일제히 피어났고, 그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춤추듯 날아올랐습니다. 월향의 모습이 꽃잎들 사이로 스며들어 달빛 속으로 사라져갔습니다.

    전주 한옥마을에는 이제 새로운 전설이 하나 더해졌습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하얀 도포를 입은 도깨비가 나타나 피리를 분다고 합니다. 그 피리 소리는 더 이상 슬픔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헤어진 연인들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달빛 아래 피리 소리가 들리면, 그것은 누군가의 애타는 그리움이자, 새로운 만남을 위한 약속이라고. 달빛 도깨비는 지금도 그곳에서 피리를 불며, 인연의 끈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달이 떴습니다. 어디선가 맑은 피리 소리가 들려옵니다. 당신의 소중한 인연도 저 피리 소리 속에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전주 한옥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달빛 아래 피리 부는 도깨비'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다.
    이 전설은 실제로 전주의 오래된 한옥마을 골목길에서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피리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죠.

    혹시 여러분도 보름달이 뜨는 밤, 한옥마을을 걷다가 피리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달빛 도깨비의 연주일지도 모릅니다.

    다음 이야기도 기대해주세요.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도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반응형